(…) 가령 로마인들이 단지 종교를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로마인들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불의를 행해야겠는가? 그들에게 박해자였다는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우리 자신은 박해자가 되려 하는가?
양식이 전혀 없는, 혹은 아주 광신적인 사람이 있어서, 이 자리에서 내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의 과오나 결점을 들춘 것이오? 우리의 기적이 거짓이고 우리의 전설이 꾸며진 것이라 해도 무엇 때문에 그것을 부숴버리려는 것이오? 그런 전설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심의 자양분이 되고 있소. 어떤 오류는 필요하기도 한 법이오. 뿌리깊은 종양이라면 그것을 잘라내려다가 전부 망칠지도 모르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오.
이에 대한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기적들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놓는 당신들의 이 모든 거짓 기적들, 복음서의 진실에 덧붙여놓은 당신들의 이 모든 불합리한 전설들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신앙심의 싹을 꺾고 있소. 앎을 얻고자 하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 그러나 그러기 위한 시간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오. 나의 신앙 교사들은 나를 속였다. 그러니 신앙에서는 진실을 찾을 수 없다. 오류에 파묻히기보다는 자연의 품속에 몸을 내맡기는 편이 낫다. 인간들의 창작물에 의지하느니 나는 차라리 자연법을 따르겠다고 말이오. 어떤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도 하오. 그들은 거짓이 자신들을 얽매고 있음을 알게 되지만, 그들은 진실의 당연한 구속조차도 달갑지 않은 터라 무신론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오. 그러므로 이들은 정신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지만 그것은 바로 다른 편이 위선적이고 잔인했기 때문이라오.
이것은 분명 갖가지 종교적 기만과 맹신이 낳는 결과들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올바른 추론을 하는 데 어느 정도의 한계를 지닌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논법은 썩 옳지 못한 것인데, 예를 들어 “『황금 전설』의 저자인 보라지네나 『성인들의 꽃』을 편찬한 예수회 수사 리바데네이라가 그들의 저술 속에서 이야기한 것은 모두 엉터리일 뿐이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을 내린다거나, “가톨릭 교도들은 많은 위그노들을 죽였고 위그노 역시 많은 가톨릭교도들을 죽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다거나, “사람들은 신앙고백, 성찬식 같은 온갖 성사聖事를 구실로 가장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논법들이다.
나는 여기서 이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즉 하나님은 존재하며, 이 다음 우리가 덧없는 인생을 마친 후에 우리들을 위안해주실 것이다. 그 찰나적인 생을 사는 동안 그를 너무도 잘못 이해했고, 그리하여 그의 이름으로 그토록 많은 죄악을 저지른 나머지 참혹한 기억에 짓눌려 고통받을 우리들을 말이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종교로 빚어진 전쟁들, 거의 모든 경우에 피를 흘리게 했던 마흔 번의 교회 분열을 생각할 때, 거의 언제나 참화를 초래해온 거짓들이며 서로 다른 견해들로 촉발된 풀 수 없는 증오들을 고려할 때, 그리고 그릇된 종교적 열광이 낳은 모든 불행들을 볼 때, 인간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지옥에 빠져 있었던 셈이기 때문이다.
― 이 책, 122쪽~125쪽.
프로테스탄트인 장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던 아들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모함을 당해 극형에 처하는 사건에 충격을 받은 볼테르는 이성의 빛으로 광신을 쬐어 무익하고 어리석은 종교적 불관용을 끝내고자 이 책을 썼다. 볼테르는 주로 군주, 귀족과 같은 사회의 고위층을 주된 독자로 염두에 두면서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홍세화 선생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개탄하지만, 믿음이 다르다하여 살생을 일삼던 볼테르의 시대에 비하면 오늘날은 양반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오늘의 볼테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약 이들 중에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의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다름’이 ‘틀림’은 아닐지언정, ‘다름’은 확실히 불편한 것이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머리로는 “이해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되새겨도 불편한 것은 불편한 것이다. 불편한 것을 불편하지 않다고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다. 다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는 얼마나 불편할지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오늘(9월 16일) 새벽에 이랜드 홈에버 면목점을 점거하고 농성하던 노조원들이 전원 연행되었다[관련기사]. 노조의 파업에 불편을 토로하는 ‘시민’이라는 가면을 쓴 ‘작자’들은 최소한 왜 ‘그들’이 거리로 나서게 되었는지 정도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시민’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대이다. 그 최소한도 하기 싫다면,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시민’에의 정체화(identify)를 진지하게 재고해주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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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론 - ![]() 볼테르 지음, 송기형.임미경 옮김/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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